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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의 독서노트

독서후기 : 아 보람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by 데이빗_ 2016.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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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 아 보람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읽게 된 동기>

한동안 온라인 서점 메인 화면에 이 책이 떠 있었다. 그림도 조잡해 보이고 뭔가 내용이 없어 보여서 그냥 흘끔 보고 지나치곤 했다. 읽을거리가 떨어지면 상당히 불안해하는 편인데, 마침 그 날은 사 놓은 전자책을 다 읽어 버려서 더 읽을 책이 없었다. 책을 고르는 것도 아까운 시간을 쓰는 것이다 보니, 일단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가볍게 읽을 책으로 하나 골랐다.

​<전체적인 느낌>

삽화가 재미있음. 원래 일본작가 “히노 에이타로”씨가 쓴 책인데 한국판으로 번역되면서 “그림양왕치기”라는 예명을 쓰시는 양경수님의 삽화가 들어갔다. 원래 일본어판에 삽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평상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노동문화, 노동윤리에 대해서 물음표를 던지는 도발적인 내용이지만, 듣다 보면 그럴싸하다. 소속된 조직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종래의 노동윤리는 상호 동등한 입장에서 체결된 계약의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개인의 가치관과 우선순위는 누가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 요즘은 회사에 올인하는 것만이 올바른 삶이라는 명제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뭔가 딴짓을 하면 은연중에 죄책감을 가지는 게 사실 아닌가. “본분”을 망각한 행동이라고. 사실 “본분”이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아주 폭력적인 단어이다. 학생의 본분, 직장인의 본분, 남편의 본분, 아내의 본분 등등. 누가 인간의 용도를 “본분”이라는 말 한 마디로 정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본분 따위는 없다. 자기의 가치관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고, 그에 따르는 결과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무튼 이 책을 읽고 나서 약간 가치관의 변화를 가지게 되었다.

​<기억에 남는 구절>

​​일에서 무엇을 우선할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 일의 보람보다 먼저인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우선시하면서 일할 수 있는 방식을 추구할 자유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

보람이 먼저인 사람들은 보람을 추구하면 된다. 돈이 먼저인 사람들은 돈을 추구하면 된다. 누군가가 회사를 돈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근거는 없다는 것. 회사보다도 개인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정해진 월급만 받고 칼퇴 하고 개인 생활 즐기면 된다. 그게 잘못됐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따지고 보면 그게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이 새롭게 느겨지는 노동문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우리는 학창시절부터 “정해진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도록 규제받는다. 윤리와 도덕, 그리고 법과 규칙을 지키도록 요구받는다. 그런 규제와 교육에 따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시민으로 길러진다는 점은 인정. 그냥 거기까지다. 그런데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고 하면서 다른 선택지를 주지 않는 집단주의는 문제. 그냥 그렇다 보니 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조직에 충성하는게 당연하다는 불문율도 생기는 거 아닌가?

​​(유급휴가를 쓰기 어려운 분위기에 대해) 나는 그런 분위기가 필요 이상으로 주변과 맞추려고 하는 습성 때문이라고 본다.

다행히도 우리 팀은 휴가 쓰는 걸 가지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업무 인수인계만 잘 해 놓고 간다면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다. 장기휴가를 갔다 와도 업무적으로 연관된 몇몇만 알 뿐,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런데도 휴가 내기가 왠지 신경쓰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역시 필요 이상으로 주변과 맞추려고 하는 습성 때문이겠지. 이제부터는 좀더 당당해져야겠다. 회사의 “인정”이 있어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나는 나다. 나는 내 가치관과 내 우선순위에 따라 행동할 따름이다. 누가 뭐라겠는가. 근데 그러다 고과 나쁘게 받으면? 이라는 생각이 아직도 발목을 잡지만....

​​법을 지킨다고 회사가 망한다면 그런 회사는 그냥 망하면 된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회사를 연명시킨다고 해서 이 사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며칠 전에 한여름에 인형탈 쓰고 알바하는 사람을 두고 아내와 열띤 토론(?)을 했다. 내 주장은 “저런 일자리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저런 일자리를 만들면 그건 틀림없이 능력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였고, 아내는 “저마저도 없으면 저거 할 사람은 손가락 빨고 놀아야 할 수도 있다. 서로가 동의해서 체결된 근로계약 아니냐” 였다. 나는 그래도 내 주장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아내의 말도 사실 따지고보면 틀린 것은 아닌 것 같고...

최저임금 올릴 때마다 “그렇게 하면 경영이 어려워진다”고 아우성치는 경총의 주장을 들을 때마다 다소 황당하긴 하다. 최저임금도 못 줄 회사면 폐업하는게 맞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 회사에 고용된 사람들의 당장의 생계는 어찌하고? 라고 생각해 보면 그렇게 쉽게 단정지을 문제도 아닌 것 같다.

​​학교에서 시행하는 직업교육은 안타깝게도 그 내용이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 .. 어떤 노동관을 갖고 일할지는 각자에게 주어진 문제다. 학교에서 구태여 일괄적으로 가르쳐야 할 내용은 아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각자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지켜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노동관을 성립해 가면 된다. 반면 노동자의 권리는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이는 노동관보다 몇 배 더 중요하다.

이건 동감이다. 왜 학교에서는 일방적으로 사측에 유리한 노동윤리를 가르치는 것일까? 노동을 보람이나 자아실현 등으로 포장해서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시각을 바꾸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제는 근로가 “나를 뽑아준 회사의 은혜를 입는 것”의 개념이 아닌, “근로자와 사용자간의 평등한 계약관계”라는 개념이 정립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이미 사축화(?)된 기성 세대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힘들겠지만... “남녀평등”이 황당한 개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학교에서부터 성평등을 강조하니 우리 세대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초등학교 때부터 근로를 계약으로 가르치는 교육이 필요한 것 같다.

​​결국 중요한 사실은 ‘남들과 똑같이’ 되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게 행동하는’것이다.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좀더 소중히 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대충 ‘남들에게 맞추는’일에만 에너지를 쓰면서 내키지 않는 인생을 살다가 끝나게 된다.

이 책의 주제가 아닌가 싶다. 결국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나답게 살라는 것.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삶이 아닌가 싶다. 명예, 돈, 권력보다는 가장 자기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 어쩌다보니 우리의 욕망조차도 거대한 사회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는 것 같다. 그냥 다, 큰 아파트, 좋은 차, 더 많은 돈을 추구하도록 은연중에 교육되는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사축이 되고, 더더욱 은행의 종이 된다. 이런 시스템이 바람직한 것일까?

​<읽고나서>

인용하지 않은 구절 중에는 사축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일단 빚을 지지 말고 생활 규모를 줄여라. 회사의 종이 되지 않고 당당하게 살려면, 회사에서 잘려도 대응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뜻이겠지. 이미 상당한 규모로 불어버린 내 라이프스타일도 다운사이징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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