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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의 독서노트

독서후기 (2017-3) : 태백산맥

by 데이빗_ 2017.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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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소설이란 건.. 뭐랄까. 진입로가 수풀 속에 가려져 있는 등산로 같다고 해야 할까. 처음 열몇 페이지는 지루하고 잘 이해하기 힘들어도, 일단 길을 잡으면 쭉쭉 읽히는 맛이 있다. 그 정복로를 쉽게 내보여 주지는 않는다. 일단 길을 찾으면 큰 어려움 없이, 시간을 꾸준히 내기만 한다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게 문학작품 아닌가 싶다.

서른 다섯 살인데, 조정래씨의 ‘태백산맥’ 리뷰를 이제야 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조금 면피를 하기 위해 뱀발을 덧붙이자면, 다 읽은 것은 사실 작년말~올해 초였다. 이 거대한 소설을 어떻게 리뷰하면 좋을까, 내가 이런 서평을 남길 자격이 있는 걸까 뭐 등등 그런 생각으로 글 쓸 자신이 좀 부족한 상태에서 차일피일 미루어 뒀다가, 이제야 서평(이라고 하기에는 딸리고, 그냥 독후감이라고 하자)을 남기게 된다.

이 소설은 6.25 전쟁을 전후로 한 극도의 좌우 대치 시절을 배경으로 했다. 지주 계급과 소작인 계급 사이의 갈등을 잘 표현해 냈고, 억울하게 당하고만 살았던 힘없는 대중들의 한이 잘 표현되어 있다. 공산주의 운동을 그런 한맺힌 농민들의 이른바 ‘해방’이라는 시각으로 풀이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가진 자들의 욕심이라는 게 얼마나 지독할 수 있는지, 그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아무 것도 없어서 그저 당할 수밖에 없었던 소작농들의 처지가 얼마나 답답했었는지, 왜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 수밖에 없었는지, 소설을 읽으면서 그 개연성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는 했다. 나 같은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아마 이 소설이 대단히 위험한 사상서에 속하기도 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살벌한 군사정권 시절에 연재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이런 소위 “좌빨”대하소설이 순조롭게 마무리될 수 있었을까? 군에서는 이 소설을 금서로 지정한 적이 있었다는 말도 있는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양한 인물들의 행동과 성격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요소였다. 개인적으로 제일 매력적이었던 인물은 심재모 중위였는데, 이 사람은 공산분자들을 토벌하는 국군부대의 장교였는데, 그나마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자기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빨치산 토벌 임무를 수행하고는 있지만, 양심과의 갈등 때문에 고뇌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덕행을 많이 베풀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김사용 지주의 아들 김범우도, 지주계급의 횡포는 부당하다고 여기지만 그렇다고 공산주의운동을 적극 지지하지도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나름대로 중립을 유지하면서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처신하고자 하지만, 그의 주위 환경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아서 참 기구하다고 여겼다.
염상진이는 공산주의 운동의 리더급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해방되기 전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해서, 김사용으로부터 척박한 땅을 받아 개간하면서 억울한 처지의 농부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시킨다. 계몽운동 비슷하게. 소설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주연급 인물이긴 한데, 내가 아는 어떤 밥맛없이 늘 가르치려 드는 어떤 사람이 자꾸 오버랩돼서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염상구 이놈. 이 놈은 대체 뭘 하는 망나니일까? 염상진의 동생인데 어릴 때부터 형과 차별을 많이 당해서 형에 대한 반감 때문에 반공사상에 깊이 심취한 녀석이다. 깡패질, 강간질, 온갖 양아치 짓은 다 하고 다니는 범죄자 놈인데, 좌익의 입장에서 소설을 쓰려다 보니 자연히 이런 반공주의자들은 깡패 내지는 무뢰배로 그려졌어야 할 것이다.

억울한 민중들의 한이라는 주제를 큰 줄기로 놓고 소설이 전개되다 보니, 우익쪽 인사들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한 부분도 보인다. 대한민국정부를 마치 정통성 없는 괴뢰정부인 것처럼 표현하고, 그에 반해 공산세력들의 순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도 많이 보였다. 아마 소설이 그런 한맺힌 초창기 공산주의자들의 시점에서 쓴 것이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여성에 대한 비하, 과도히 저속한 표현 등은, 문학적인 허용범주를 고려하더라도 좀 지나친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다. 일단 재미있다. 흡입력이 있다. 소설이 곧 사실인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을 통해 해방이후 사회의 모습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왜 그렇게 극렬한 사상적 투쟁이 벌어졌어야 했는지 그 배경도 어느 정도 짚어볼 수 있었다. 서구권의 많은 나라에서는 실패했던 공산주의 투쟁이 왜 한국에서 그렇게 득세할 수 있었을까?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지독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을 품게 하지 않았더라도, 그래도 어느 정도 노력하면 발전할 수 있겠다는 최소한의 희망이 있었더라면, 공산주의 운동이 그렇게 많이 힘을 얻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유시민 씨의 “국가란 무엇인가”에서는, 불공평의 정도가 감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있고,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수단으로는 그 상황을 개선시킬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만 혁명이 성립한다고 한다. 현대의 한국이 여전히 불공평한 나라라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혹은 이따금 폭력적인 반정부 시위가 벌어짐에도 시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저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국가의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운동에 오염되게 된 배경이 지주계급의 지나친 횡포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면, 지주 계급이야말로 의도치 않게 공산주의사상의 열렬한 후원자 노릇을 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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