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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의 생각모음

카이스트 진학기

by 데이빗_ 2016.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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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나는 성적이 꽤 괜찮은 편이었다. 1학년 때 첫 학력평가에서 소위 “올백” 맞은 것을 시작으로, 졸업할 때까지 6년 동안 시험마다 전과목에서 열 개 이상 틀리면 “시험을 망쳤다”고 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때 뛰어났던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랬을까마는, 나름대로 우등생이었던 나에게 부모님께서는 상당한 기대를 거셨던 것 같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과학고등학교”라는 곳에 대해 소개해 주셨다. 중학교 성적 상위 3% 이내의 초 우등생들만 지원할 수 있는 명문 고등학교인데, 이 곳에 들어가면 KAIST나 서울대는 기본적으로 쉽게 진학할 수 있고, 그러면 초 엘리트 코스에 진입해서 승승장구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이야 과학고 간다고 인생이 잘 풀린다는 말을 곧이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은 물론이고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그런 고급 정보(?)를 가지고 계셨다니, 아버지께서는 자식 교육에 상당히 깊은 관심과 혜안을 가지고 계셨던 게 분명하다. 아무튼, 공학자가 꿈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권유를 따라 과학고-KAIST 노선을 유일한 진로로 설정했던 것 같다.

자식을 좋은 대학 보내려면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우리 할아버지는 그냥 서민이셨고, 어머니도 학교 한 번 찾아가지 않으시는, “교육 정보”와는 무관한 분이셨다. 할아버지의 재력도, 엄마의 정보력도 없는데다 아버지가 관심까지 많았으니, 내가 중학교부터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나 싶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 보는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하실 단칸방에 사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신도시급 아파트가 즐비한 지역의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한 반 45명 중에 40명 이상이 보습 학원을 다닌다는 사실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공부와 성적에 관한 친구들의 적극적인 관심도, 초등학교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하는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내 성적은, 시험을 볼 때마다 꾸준히 떨어졌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건만 아버지께서는 사태의 파악이 늦으셨는지, 지속적으로 과학고등학교-과기대 진학의 꿈을 불어 넣으셨다. 나도 다소 현실 인식이 좀 어두웠던지라(?) 그저 막연히, 과학고 진학을 위해서 떨어진 성적을 어떻게든 올려 보려고 발버둥칠 뿐이었다.

중학교 졸업 당시 백분위는 상위 11%였다. 과학고 입시 자격은 당연히 주어지지 않았고, 외국어고 입시도 낙방했다. 이해찬 1세대, 고등학교 내신이 너무나 중요해서 일부러 특목고 진학을 피하는 분위기였던 시절에 말이다. 대일외국어고등학교 입시경쟁률은 1.16:1 에 불과했는데도,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확실했다. 나는 영재가 아니었다. 그냥, 나는 반에서 쪼끔 상위권에 드는 평범한 학생일 뿐이었다. 초등학교 때 반짝반짝 빛났던 영재는, 고등학교에서 “수포자”, 즉 수학포기자가 되었다. 동아리 활동에 전념해서 공부는 뒷전이었고, 400점 만점이었던 수능 모의고사 성적은 300점을 넘겨보질 못했다.

그런 주제에, 어릴 때 각인되었던 KAIST 의 미련은 여전히 남아 있었는지, 수시로 입시 홈페이지에 기웃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서 그렇게 되뇌었다. “그래, 내신은 꽝이지만, 수능을 잘 보면 그걸로 우수성 입증이 가능할지도 몰라.” 멍청하게도. 지금 KAIST 들어오는 학생들을 보면, 당시에 내가 가졌던 생각은 정말 안이한 것이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이었다.

수능 모의고사 성적은 실제 수능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나는 전과목 400점 만점 중에 270점이 안 되는 성적으로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했다. KAIST는 커녕, 인서울도 못 할 성적이었던 나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경북 구미에 있는 나름 지역에서 유명한(?) 국립 공과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등록금이 아주 저렴했기 때문에 그나마 “국립대 들어갔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을 뿐, 대학 생활에 어떤 재미나 자부심을 느낄 수는 없었다.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대학 신입생 중에는, “반수”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한 번 미끄러졌지만 다시 한 번 제대로 해서 이번에 꼭 좋은 대학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런 축이었다. 그런 결심을 했다면, 입시 종합반에 들어가든지 기숙학원에 들어가든지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건만, 그냥 단과반에 다니면서 인터넷 강의 듣고 혼자서 공부할 뿐이었다. 최고가 되기를 꿈꾸기만 했지, 전혀 그에 걸맞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무슨 결과가 좋았겠는가. 그나마 다행히 1년 공부 더 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서울에 있는 중하위권 대학에 간신히, 추가합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마 나까지 입학하고 나서 추가합격자 문을 닫았던 것 같다.

이제 반수의 기회도 없었다. 여기서 졸업해야 했다. 더 이상 다른 길을 기웃거릴 찬스도 이유도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게 있다면, 내가 직접 선택한 학과였기 때문에 공부에는 흥미가 있었다는 것. 고등학교 책들과 달리 교과서도 나름 “뽀대”가 났다. 대학교 1학년이 배우는 과목이 뭐가 그리 대단했겠는가. 뽀대가 나 봤자 미적분학이나 대학물리학 같은, 그냥 아주 기초적인 과목들이었겠지만, 영어로 쓰여 있는 교과서는 나름대로 “있어” 보였고, 나도 마치 나름 지성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부를 잘 하려면 교과서가 멋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공부가 재미있다고 느껴 본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수업 시간에 내 준 숙제는 집으로 들고간 적이 별로 없었다. 과제가 나오면 공강 시간에 바로 도서관에 들어가서 참고서적을 들춰 가며 작성해서 당일날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첫 학기 시험에서 평점평균 4.5점 만점에 4.5점을 맞았다. 아마도 별로 “쎈 학교”도 아니었고, 첫 학기였으므로 다른 동기들이 모두 동아리 활동이나 연애사업(?) 등에 몰두해 있어서, 상대적으로 경쟁에 유리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초두 효과는 꽤 강력한 것이어서, 나는 첫 학기 성적으로 “대학 우등생”의 이미지를 내면에 확실하게 각인할 수 있었다. 평범했던, 그냥 현실인식 없이 꿈만 야무졌던 재수생은, (비록 중하위권 대학일지라도) 대학 첫 학기에 완전히 판세를 뒤집었다. 몇몇 취약한 교양과목 때문에 다소 주춤할 때도 있었지만, 전공 공부는 정말 재미있었고, 그 자체가 무엇을 가져다 주는 게 아닐지라도 나를 몰입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참고서를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부모님의 지원 하에)

필요하면 교수님 연구실에 찾아 가서 물어보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고, 실습 수업을 수강하게 되면 실험 키트를 직접 구입해서 직접 실험해 볼 정도로 의욕이 넘쳤다. 흥미를 가지니 수업 내용의 이해도도 높았고, 성적도 자연히 따라오게 되었다. 사실 성적이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학과 공부 자체가 재미있었으니까. 공부하면 취업에 도움이 되니까, 대학원 진학에 도움이 되니까 등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미래에 관한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 그 자체에 관심과 흥미를 가졌고, 더 알고 싶은 순수한 학문적 동기만 작용했다.

대학3학년이 되니 진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더 심하지만, 그 때도 학부 졸업자들의 취업 형편은 아주 어려웠다. 명문대 졸업생들도 미취업자가 넘치는 판국에, 학과성적이 좋다 한들 서울시내 중하위권 대학의 졸업자가 취업할 길은 마땅치 않아 보였다. 아니, 그 이전에, 내 안에 잠시 잠재워 둔 KAIST진학의 꿈이 다시 되살아나 있었다. 그 동안 쌓아 놓은 성적을 보니, 이번에는 승부를 걸어볼 만 했다. 본격적으로 TOEFL 시험 준비와 학과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기출 문제들을 찾아 보며 면접 시뮬레이션을 했다. 군 미필이라는 현실적 압박도 있었지만, (떨어지면 그 나이에 군대를 가야 하니까)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생각으로 밀어부쳤다. 마지막 승부라는 게 스트레스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승산이 있다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다.

졸업 평점평균은 4.5만점에 4.3을 넘었다. 학과 수석이었고,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단과대학 차석이라는 설도 있었다. 중하위권 학교라는 핸디캡이 있었지만, KAIST 서류 전형, 그리고 면접을 무사히 통과했다. SK하이닉스 (당시 하이닉스반도체) 산학장학생이어서, 석/박사 학위 기간 동안 학자금과 생활비까지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뛰어날 것 없고 그다지 노력도 않는, 몽상만 할 줄 알았던 평범한 고등학생이, 우여곡절 끝에 KAIST 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마음 속에 꿈을 심으시고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해 주시는 성령님의 인도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대학원 입시는, 그리고 학위 과정은, 몇 일, 혹은 몇 주간에 걸쳐 완성되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숱하게 포기의 유혹을 넘겨야 했고, 숱하게 자기 자신과 타협할 기회를 버려야 했다. 그냥 이쯤해서 꿈을 접으면, 꿈과 현실 사이의 갭 때문에 느끼는 압박과 스트레스를 피할 수도 있었다. '내 능력이 원래 그냥 이 정도였지 뭐' 하면서 접어 버렸다면, 어릴 때 품었던 원대한(?)꿈을 이루지 못한 상황이 편안하게 정당화될 수도 있었다. 성령께서는, 내가 과중한 압박감에 "포기"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스트레스를 이길 내성을 주셨다. 꿈을 향해서 뛰어갈 용기도 주셨다.

누구나 자기의 "노력의 양" 이라는 잣대 앞에서 자신있기는 어려운 것 같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한들, "나는 이만큼 준비했으니 충분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노력부족 컴플렉스는 감당하기 힘든 장애물이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는데, 남들만큼 열심히 한 것일까?'라는 생각.

어느 날 욥기를 읽고 있었다. 자기의 의로움을 항변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결정타를 날리셨다. "누가 먼저 내게 주어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욥 41:11)" 자칭 "의로운"욥에게 고난을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불의하시냐는 질문은, 욥에게는 아픈 것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격려였다. 하나님께선 이 구절을 통해 나에게 이렇게 묻고 계셨다. "네 노력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게 해 준다면, 내가 불의한 것이냐?"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 꿈만 꾼다고 이룰 수 없는 일이 있다. 노력 위에 부으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일이 있는 것 같다. 내 삶이 그랬다. 입시도, 학위도, 결혼도, 입사도, 모두 그 위에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남들은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라면서 "전능하신" 노력님을 찬양하지만, 나는 "노력"은 하나님이 아니란 것을 믿는다. 그 위에 부으시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믿을 때,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껍데기를 벗을 수 있었다.

좋은 학교에서 공부 많이 했지만, 내 겉모습은 아직은 그냥 회사원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특별하게 보일 것 없는, 그냥 대기업 과장이지만, 나는 내가 특별함을 믿는다. 나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꿈을 심으시고 나를 드라이빙 하시는 내 안의 성령님 때문에. 노력 위에다가 아낌 없이 은혜를 부으시는 하나님의 도움 때문에. 이제 "책쓰기"라는, 새로운 도전을 거치고 있다. 지금껏 그러셨듯, 특별한 꿈을 꾸게 하신 것도 내 안에 계신 인도자이시니, 이루게 하실 분도 그분이실 것이다. 김병완 작가님을 만난 것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특별한 찬스임을 믿으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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