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전집 읽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테스, 목로주점에 의해 읽은 세 번째 작품이다. 아이들을 위한 모험담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꽤 심오한 철학적 사유가 들어가 있는 장편 소설이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으로서 번역이 아주 매끄러웠다. 내용도 재미있고 번역도 잘 되어 있어서 흡입력이 있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안정적이고 안락한 중산층의 생활을 권유하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집을 나와 배를 탄다. 항해 생활을 하면서 꽤 부자가 되어 브라질 농장주로서 정착한 그는, 노예 밀무역을 하는 일에 가담하여 노예선 관리인으로 또 다시 배를 탄다. 풍랑을 만나 좌초된 그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브라질 근처의 어느 무인도에 표류해서 혼자 살아남는다.
처음에는 절망하고 좌절했지만, 이내 그는 나름대로 살 길을 찾는다. 바위 밑에 요새를 만들고, 난파선에서 가지고 온 물건들로 생활을 꾸려 나간다. 야생에서 동물을 잡아서 먹기도 하고, 과일을 따 먹기도 하면서 처음 생활을 버텨 나가다가, "지속가능한 식량공급"을 위한 각종 계획을 짜내서 무인도 정착에 성공한다.
그가 무인도에 정착하기 위해 했던 일은 참 흥미진진하다. 요새를 안전하게 꾸미고, 겨울 식량으로 쓸 수 있도록 포도를 따다가 말려 건포도를 만들어 저장한다. 염소를 길들여 사육하고, 밭에 벼와 보리를 심어 몇 년에 걸쳐 불림으로써 안정적인 탄수화물 공급에 성공한다. 사육한 염소에게서 젖을 짜서 우유와 치즈를 만든다. 진흙으로 토기를 만들어 국을 끓여 먹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고, 나무를 잘라 몇 주에 걸쳐 다듬어 탁자와 의자를 만든다.
그렇게 정착해 가는 도중 그는 섬 반대편에서 (섬에 살지는 않지만) 본토에서 포로를 데리고 온 식인종들이 사람을 요리해 먹는 정황을 발견한다. 안락한 생활에서 경계 모드로 돌아선 그는, 몇 달에 걸친 경계 끝에 결국 식인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급습해서 한 명의 포로를 구출해 낸다.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의 그 포로는 이후 로빈슨의 충실한 부하가 되어 그를 돕는다. 야만인이었 프라이데이를 교화/계몽하고 복음을 가르치는 로빈슨의 모습은, 과연 그가 이전에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자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20년이 넘은 어느 날, 한 영국 배가 무인도에 찾아온다. 그 배는 선상에서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선장과 승객을 살해하려고 무인도에 찾아왔는데, 그 현장을 로빈슨과 프라이데이가 습격하여 일망타진하는 장면이 나온다. 로빈슨은 이 배로 인해서 영국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스토리는 자체는 한 선원의 표류생활 생존기이지만, 곳곳에 적혀 있는 로빈슨의 사유로부터 꽤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교훈도 얻을 수 있다.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희망을 찾은 일,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던 일, 현실적인 공포감이 어떻게 신앙을 희석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 등등. 책 곳곳에서 직간접적으로 많은 교훈과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다. 고전문학작품은 재미라는 요소를 동반한 훌륭한 인문학의 보고가 아닌가.
섬에서 20년 넘게 고립되어 있으면 그 기분이 어떨까. 아마도 제정신은 아닐 것 같다. 작가의 상상에 의해 지어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도 있었다. 섬에서 혼자 십 년 넘게 살았는데 모국어를 계속 말할 수 있을까? 멘탈이 갑 오브 갑인 아주 강력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구원의 희망이 절대 없는 곳에서 낙심하지 않고 성실하게 염소를 키우고 밭을 일구며 생활을 풍족하게 할 수 있을까? 외로움과 고독함보다는 기간 동안 자기가 배우고 깨달았던 것에 대해 오히려 긍정적인 문체로 서술되어 있었는데, 과연 그게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감사할 이유를 찾는 점은 내가 배워야 할 교훈인 것 같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을 항상 기대해야 한다는 점도 교훈이다. 자세한 내용은 책 속 구절의 인용과 함께…
<기억에 남는 구절>
그래, 네가 비참한 처지에 처해 있는 건 맞아. 하지만 부디 기억하라고. 너 말고 다른 선원들은 어찌 됐지? 모두 열한 명이 보트에 타지 않았어? 왜 너만 홀로 선택된 걸까? 현세가 좋은 거야 내세가 좋은 거야? 그러면서 나는 바다를 가리켰다. 모든 나쁜 일들이란 그 안에 존재하는 좋은 일, 그리고 그런 일들에 수반되는 더 나쁜 일들과 함께 고려해야 하는 거야.
- 로빈슨이 무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절망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각한 내용이다. 스스로를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에 의해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로빈슨이 이것을 깨달은 것은 작가의 상상에 의해 지어진 설정이지만, 현실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가르침을 통해 평상시에 의식을 고양해 나가야 어려움에 빠질 때 스스로를 추스릴 수 있다.
내 사례가 세상의 온갖 상황 중 가장 비참한 상황을 경험한 데서 나온 지침으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늘 우리에게 뭔가 위안을 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지침, 그리고 행운과 불운 양쪽을 차변과 대변으로 나누어 설명해 놓은 회계 장부가 있다면 가급적 행운을 기록한 대변 쪽에 마음을 기울이라는 지침 말이다.
- 맞는 말이다. 직장에서 힘들어 지친 사람이라면 백수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할 노릇이다. 집이 좁아서 불만인 사람이라면 집조차도 없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도 직장이 있고, 집이 있다는 점은 다행인 것 아닌가!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좀더 긍정적인 쪽으로 옮길 수 있고, 불만족스러운 현실보다는 섭리를 베푸시는 하나님께로 더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처럼 열두어 개의 곡식 알갱이가 손상되지 않은 채 무사히 남아 잇었다는 사실 (나머지는 모두 쥐들이 먹어 버렸다) 하필이면 내가 그 곡식 알갱이들을 특정한 장소에 버렸다는 사실은 사실상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 곡식 알갱이가 우연히 싹을 틔운 상황은, 보기에 따라서는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빈슨은 이것을 하느님의 섭리로 이해하고 해석했다. 현실보다 해석이 믿음이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영적인 예민함이 필요한 것이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나를 불러라. 구해 주리라. 너는 나에게 영광을 드려라> .. 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자신들이 먹을 살코기를 약속받았을 때 말한 것처럼 뇌까렸다. <하느님께서 무슨 수로 이 사막에 잔칫상을 차려 준단 말이아?>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하느님께서 무슨 수로 나를 이 섬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단 말이야?> 여러 해 동안 내겐 아무런 희망도 없었던지라 이런 생각이 종종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쨌든 앞의 성경 구저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이후로도 나는 자주 그 구절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 정말 어렵던 대학원 시절에는 순간순간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도우심을 갈망했다. 믿는 만큼, 메추라기와 만나를 맛보았고, 불기둥 구름기둥을 보았고, 바위에서 솟는 샘물을 먹었다. 요즘은 어떤가? 더 풍족하지만 더 메마른 것은 아닌가? 로빈슨이 당한 상황보다 겉보기에는 편하지만, 누구라도 로빈슨보다 더 정신적으로 풍요롭지 않을 듯. 다시 한 번, 무인도에 사는 사람의 심정으로, 세세한 곳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또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해 보아야겠다. 곰곰이 생각하는 것.. 묵상. 묵상이 중요하다.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예전에는 구원이라는 것을 그저 섬에 갇혀 있는 내 처지로부터의 구출로만 생각했지 그 밖의 다른 의미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정말이지 섬에서 마음껏 자유를 구가했어도 그곳은 분명히 감옥, 그것도 세상에서 최악의 의미를 지닌 감옥이었다.
- 이 탁월한 통찰이란. 섬은 자유로워도 그곳은 감옥이라는 말. 마찬가지로 몸은 자유로워도 내세의 진정한 자유가 확보되어 있지 않다면 이 곳은 감옥인 것이다.
평화와 감사와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찬 마음가짐이 공포감과 심적 동요로 가득 찬 마음가짐보다 기도에 훨씬 더 적합한 마음 상태라는 것이다. 또한 다가오는 재난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상태에서는 인간이 위로를 받으며 하느님께 기도의 의무를 다하는 일이 병석에 누워 잇는 상태에서 회개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병으로 인한 심적 동요가 우리의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두려움으로 인한 심적 동요도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분명히 우리의 정신적 동요는 부득불 신체의 장애만큼이나 큰 장애이다. 게다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일은 신체 활동이 아니라 정신 활동이기 때문에 더 큰 장애이다.
- 우리의 기도가 올바르기 위해서는 그 동기가 평화와 감사여야 한다. 불안함으로 인한 기도는 불안함에 대한 고백일 뿐이며, 바로 그 고백대로 되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공포와 불안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신앙적 의지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실은 내가 처해 있던 위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그걸 모르고 완전한 만족감에 싸여 실제로 그런 위험에 노출된 적이 없는 사람처럼 위험에 대해 전혀 무지한 채 행복하게 살았던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유익한 생각을 많이 제공했다. 특히 인간을 다스리시면서, 사물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과 지식에 이 같은 편협한 한계를 설정해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란 얼마나 선량하신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란 수없이 많은 위험들 속을 걸어가는 존재이며, 혹시라도 그런 위험들이 드러나 목격하게 되면 넋이 나가고 우울증에 빠져 버린다. 하지만 그런 위험들이 눈에 안 보이게 숨겨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위험들을 전혀 모르고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업무상 실수로 인해 일을 그르친 것을 추석 연휴에 알았다면 얼마나 큰 불행인가.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도 축복이다. 모든 위험성을 다 알고 있다면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작가의 탁월한 통찰이 다시 한 번 돋보이는 대목이다.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다시피,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의 평안을 우릴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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