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소설이다. 불륜 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단순한 에로 소설은 아니고, 귀부인의 불륜과 육체관계라는 소재를 사용해서 작가의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소설이다. 처음에는 지루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대화들, 그리고 산만한 인물들의 등장이 헷갈리게 만들었다. 점점 등장인물이 좁혀지고 주인공이 누구인지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조금 집중이 되었다.
주인공 콘스탄틴 채털리는 클리퍼드 채털리의 아내이다. 클리퍼드는 장교 출신으로, 전장에서 하반신이 마비되어 불구가 된 남자이다. 이 사람은 콘스탄틴 (코니)와 결혼했지만 육체적으로 전혀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아마 그 자신도 체념하고 살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매우 소심하고 괴팍한 성격이다. 자기의 성기능이 상실되었기 때문인지 원래 그의 품성이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는 소위 "정신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육체적인 관계는 꼭 필요하지는 않은, 일종의 액세서리 내지는 "정신 생활"을 방해하는 요소 정도로만 취급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일종의 "샌님"스타일이다. 그는 코니와 육체 관계를 가지지는 않지만 (혹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니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그는 코니와의 결혼 생활을 "정신적"으로만 이어가고 있다.
콘스탄틴은 자기의 신분과 명예를 중요하게 여긴다. 계급의식이 뚜렷한 사람이다. 자기보다 계급이 낮거나, 혹은 출신이 천하면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를 않는 스타일이다. 아내와 성생활을 못 할 처지니까 다른 사람의 아기라도 가지면 자기 가문을 잇도록 하겠다고 말하는 희한한 사람이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노? 아내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져도 좋다고 말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천출"의 아이여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아내가 바람을 피우느냐의 여부보다 중요한 것이 그 바람의 상대가 누구냐 하는 것이라니!! 그는 이 작품 속에서, "정신적인 생활"만을 추구하는, 그리고 명예와 계급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멍청한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클리퍼드와 달리 코니 -채털리 부인- 는 다소 자유분방한 성의식의 소유자인 것 같다. 그는 결혼하기 전에 몇 번의 성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남편과는 달리 "정신적인 생활"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을 답답하게 여긴다. 남편의 무관심 (성적인 무관심.. 그것은 실제로 코니에 대한 무관심이나 마찬가지였을 듯) 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던 그는, 마이클리스라는 유명한 극작가 (그런데 남편 클리퍼드는 그를 세속에 물든 속물이라 칭하며 경멸한다) 와 몇 차례 육체관계를 가진다. 그는 언뜻 생각하기에는 남편보다 훨씬 더 깨어있고 개방적인 사고의 소유자인 것 같지만, 결국 그도 육체관계에서는 자기만의 만족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수컷에 불과했다.
코니는 우연히 남편의 사냥터지기로 고용된 멜러스와 관계를 가지게 된다. 멜러스는 가식으로 가득찬 신사들의 사고방식을 혐오한다. 그는 "정신적인 생활"운운하면서 헛된 것을 좇는 기득권층의 사고방식을 거부한다. "더 많이, 더 빠르게" 석탄 생산량을 늘리고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산업사회의 광기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다. 한 마디로, "대중이 추구하는 삶"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사람이다. 그는 기득권층이 되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에도 관심이 없다. 그는 현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육욕의 노예인 것도 아니다. 아마 작가는 이 사냥터지기 멜러스를 자기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혹은 이상에 가까운) 사람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코니와 멜러스는 진지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코니는 멜러스의 아이를 가졌고, 이것을 다른 사람의 아이로 숨기기 위해서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만난 어떤 남자와 바람이 나서 아이를 가진 걸로 위장하기 위해) 참 희한한 것이, 여행지에서 만난 외간 남자의 아이면 괜찮고 사냥터지기의 아이이면 안 된다는 건가? 아무튼 코니가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코니와 멜러스의 정분이 소문이 되어 클리퍼드의 귀에 들어가고, 멜러스는 해고된다. 그는 살던 곳 '랙비'를 떠나 어느 모처에 있는 농장에 취업해서 일하게 된다. 소설은, 그가 생활의 기반을 마련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멜러스의 편지로 마무리된다.
코니는 자기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 움직였다. 그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 외국 유학을 다녀 온 재원이었고, 남자 경험도 있었다. 혼전 성관계를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설정을 통해서 작가는 코니가 꽤 깨어 있는 신여성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도 꽤 열려 있는 사람이었고, 돈도 있었기 때문에 원하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런 현대 여성의 능동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튼, 정신적인 생활 운운하면서 그 외의 육체적인 관계를 도외시하는 클리퍼드의 모습은 얼마나 가식적인가. 그러면서도 (새로 고용된 돌보미, 볼턴 부인에 의해서) 결국 그는 물질적 성공을 추구하는 야심만만한 사업가의 면모를 보인다. 변질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생활" 과 "부를 추구하는 세속적인 야욕"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당시의 기득권층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작가는 이 두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소설 속에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소설을 읽고 나서 후반부에 있는 번역가의 해설을 읽는 것도 꽤 재미있다. 다소 어려울 때 이 해설을 참고하면 실마리를 잡아 가며 가이드를 받을 수 있다. 다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작가의 의도를 해설의 프레임에 갇혀서 다양하게 해석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은 주의해야 할 것 같다.
<기억에 남는 구절>
"육체의 삶이라" 그가 말했다. "그건 동물의 삶일 뿐이오"
클리퍼드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정신적인 삶"의 요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지성만 발달하고 몸은 죽은 시체의 삶보다 더 나아요"
클리퍼드의 말을 되받아치는 이 당돌함. 이것이 코니의 생각을 표현해 주는 한 마디 아닐까.
육체와 정신이 조화를 이룰 때에만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코니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해설 중에서… 적절한 해설은 소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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