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분석 업무를 하다 보면,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특히 초기 가설을 강하게 주장한 사람들일수록, 이와 반대되는 현상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의견은 의견일 뿐인데 그것을 신념으로 삼는다.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다. 반대 주장에는 과민하게 반응한다. 가설을 뒤집는 현상이 나오면 빠져나올 생각을 해야 하는데, 계속 원래 주장을 붙들다가 출구를 찾을 기회를 잃어버린다.
현 집권 세력이 이런 딜레마에 빠진 것 같다. 이들에게 "남북 화해"라는 키워드는 일종의 정책적 목표나 지향이 아니다. 이는 일종의 신앙이다. 재야 시절부 터 주장해 온 생각을, 신념이자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포기할 대상이 아니다. 전략적으로 양보할 대상도 아니다. 이에 반하는 것은 배교로 간주된다. 신앙화된 신념은 융통성을 잃어버린다. 눈 앞에 엄연히 벌어지는 "현상"을 "간과"하게 만든다. "현상"에는 눈을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보게 만든다. 종교적 신념의 속성을 그대로 닮아 있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집권당이 가진 신념 또는 신앙 때문에, 상당히 많은 변수가 상수로 바뀐다. 평화적 통일 따위의 키워드는 이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가깝게는 남북정상회담 한 번 더 하면 얼마나 많은 정치적 이득을 얻을지 모른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그리고 좀더 근본적으로는 남북평화라는 신앙으로 무장된 자들이 "자꾸 도발하면 나도 어찌될지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들은 우리가 절대로 강경하게 못한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 테고, 우리 역시 절대로 때리지 않겠다는 시그널을 계속 주고 있다.
업무상 협의를 하다보면, 때로는 말을 않는 것이 유리할 때가 있다. 내가 무엇이라도 선택할 수 있다는 여지를 가지거나, 최소한 가진 것처럼 보여야 한다. 내가 A,B,C,D 중 무엇을 선택할지 상대가 모르면, 상대의 선택지는 A,B,C,D 각각에 의해 제한되는 폭을 모두 합친 것만큼 좁아진다. 변수가 많을수록 방정식은 복잡해진다. 반면에,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어떤 목표가 있다는 것을 상대가 알면, 상대는 그것을 이용해 압박(이라 쓰고 갑질이라 읽는다)을 행해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압박을 받을 가능성은 반드시 실현되다.
북한이 연일 막말을 뱉는다. 같은 구멍으로 밥도 먹으면서 똥도 배설한다. 공동연락사무소도 폭파했다. 휴전선 초소에 다시 병력을 배치시켰다는 보도도 나온다. 남조선 당국자(?)께서는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한다. 사실 북의 행동으로 별로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는데, 당국자께서 큰 충격을 받으셨다는 보도야말로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어떤 정책적인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인내를 했던 게 아니구나. 지성이면 감북하실 것이라는 신앙과 믿음을 가지고 이 햇볕 정책인지 남북 정책인지를 펼쳐 왔던 것이었구나.
가스라이팅. 상대가 스스로를 의심하도록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해서 노예화하는 것. "내가 이렇게 하는건 네가 잘못했기 때문이야." 하고 세뇌하는 것. 지금의 상황과 묘하게 닮았다. "너희들이 삐라를 날려보내기 때문이야." "너희들이 계속 전쟁연습을 하기 때문이야." 당하는 사람도 "정말 내가 잘못한 것일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그래도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하고 합리화하는 것. "우리가 대북전단을 날려보내서 그렇다."... "이참에 한미군사연습을 없애자."... "초소에 총쏜건 의도적으로 한건 아닐거야. 오발일 거야." 연애도 이런 연애가 없다.
맹목적 신앙의 폐해는 엄청나다. 왜 전광훈 목사 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것일까? 왜 신천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일까? 광적인 신앙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어떤 숭고해 보이는 가치를 추구하면서, 눈 앞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여론의 비판은 마땅히 참고 인내해야 할 핍박이자 환난으로 여기는 것. 눈앞의 현실은 진짜를 보지 못하게 가리는 장애물로 여기는 것. 비판하는 세력을 향해서는 "지옥에 가고 샆으냐!!" 하고 윽박지르는 것. "그럼 남북대결로 가서 전쟁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성서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라는 말씀이 있다. 혹시 남조선 당국자(?)들이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개인의 신앙은 내적 확신을 근거로 삼아도 된다. 하지만 현실세계의 정책 집행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어떤 특정한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것과, 어떤 결과가 실제로 나왔는가 하는 것은 다르다. "A가 B와 같아야 한다" 는 당위성과 "A가 B이다"라는 현상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왼쪽 사람들은 대체로 당위성을 앞세워 현상을 부정하려 하는 경향을 보인다. 북의 막말과 적대 행위는 현실이다. 남조선 인민들(?)의 분노와 피로감도 엄연한 현실이다. 당국자이신 달님께서는 계속 인내하겠다고다고 하셨는데, 현실에 눈을 감고 인내함으로써 성취하고지 하는 비전은 무엇일까? 그 비전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성취되는 것인가? 당위에 의해 움직이는 건 좋은데,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참음으로 이룰 수 있는 당위란 있는 것일까? 달님이 과연 국민들을 대표해서 인내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남북 통일이라는 가치는, 우리 어린 시절 배운 것처럼 우리의 소원일까? 소원이어야 하는 것일까? 자유주의 국가에서 "우리의 소원"이란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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