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7일 주일 아침예배 설교 (홍성환 담임목사님)
(신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
<내용요약>
이스라엘 백성이 걸었던 광야 길은, 예측이 불가한 길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가는 길을 알지 못하는 막막함, 그리고 조바심에 원망, 불평, 불신앙이 드러나는 자리였다.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여정.
광야는 우리의 인생길과 유사한 점이 많다. 특히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이 펼쳐지고 있다. 어떤 것도 예측하고 준비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인생은 광야이다.
광야는 황량하고 막막하다. 외로운 곳. 고난과 시련이 있는 곳.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광야같은 곳이다.
성경은 광야를 보는 두 가지 관점을 소개한다. 인생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
인생의 관점 : 배고픈 곳, 갈증이 있는 곳, 고통스러운 곳.
하나님 관점 : 하나님과 독대할 수 있는 곳. 인생과 일대일로 시간을 가지시길 원하시는 곳.
신 1:31, 하나님은 우리를 자식처럼 품에 안아서 광야를 지나셨다고 말씀하신다.
시 23:5,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식탁을 베푸셨다고 찬송한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해 베푸신 식탁이 있는 곳이다.
광야는 내버려진 곳이 아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품이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은 모두 광야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다. 모세, 다윗, 엘리야, 바울, 예수님. 역경을 통해 단련된 사람.
구원받은 성도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훈련의 광야를 거쳐야 한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제약받는 것, 포기하는 것, 갈등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고난이자 광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곳. 그러나 그 고난은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차리신 만찬이다.
아무리 거친 길일지라도, 광야는 나를 위해 만찬을 베푸신 자리임을 믿자.
광야의 의미를 깨닫는 즉시, 고난은 사라지고 만찬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광야로 부르신다. 세상의 목소리와 단절된 곳, 하나님과 독대할 수 있는 곳. 나의 부족함을 다듬어 가시는 곳.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 광야는 은혜이다.
광야가 고난으로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광야 가운데 부르신 이가 누구이신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야로 우리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는 순간, 그 길이 꽃길이 된다.
광야 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뿐 아니라 깨닫게 된다.
광야에 들어섰다면, 출제자의 의도를 깨달아야 한다.
세상 방식으로 살지 말고, 영적으로 이기는 인생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내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노예생활로 인해 노예의 의식을 지고 살았다. 광야학교는 그 노예근성을 지우는 곳이었다.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다면, 성도는 마땅히 광야 길을 건너야 한다.
성도의 인생은, 늘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이 싸운다.
육신의 생각을 방치하고 다스리지 않으면 육신에 치우쳐 살게 된다. 육신의 생각에 골몰해 있으면 그곳으로 끌려가게 된다. 몰두하는 것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을 다스려야 한다.
롬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고 이겨내야 한다.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 것. 한 순간의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24시간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광야이다. 매 순간마다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야 한다. 아주 작은 것조차도 이기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 이김의 결국이 곧 하나님께서 차려 주신 밥상인 것이다.
신앙의 큰 비극은 무엇인가? 환경 자체가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다.
광야는 고난처럼 보이지만, 고난이 아니다. 광야야말로 나를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도록 하자.
<느낀 점>
광야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는 순간 만찬이 열린다.
기복적인 신앙을 가졌을 때는, 지금은 힘들어도 훈련이 끝나면 갑자기 환경이 바뀌어 부귀영화가 찾아올 줄로만 알았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광야의 끝은 환경이 바뀜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남으로 환경을 대하는 내 인식이 바뀌는 순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 근성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거듭나기 전에 세상을 살던 방식이 마치 노예가 살던 방식과 같았다는 것 아닐까? 오늘 하루 먹을 것을 위해서 일하던 노예, 두드려 맞지 않기 위해서 사는 인생, 오늘 하루 살아남는 것 이상의 고상한 가치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노예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났던 곳.
생계의 불안에 사로잡힌 노예, 돈의 노예, 정욕의 노예, 출세욕의 노예, 인정 욕구의 노예, 자존심의 노예..
하루하루 시계를 돌리는 동기가 이와 같은 것들이라면, 겉보기에 아무리 멋져 보여도 그 본질은 이집트의 노예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한편 이집트와 같은 멋진 문명 속에 살지 못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고자 애쓰고,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열망에 이끌려 산다면 그 인생은 진정한 주권국가의 자유민의 자격이 있는 것일 터이다.
나는 누구인가? 자꾸 뒤를 돌아보며 홍해 전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노예인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되고자 하는 거룩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성민인가?
나는 어디쯤 와 있을까? 홍해를 갓 건넌 것일까? 시내산에서 말씀을 받은 사람일까?
메추라기가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일까? 므리바에서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일까?
가데스 바네아에서 믿음을 테스트 받고 있는 것일까?
<결단과 적용>
뒤를 돌아보지 말자. 이집트에 있던 것들을 그리워하지 말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답게,
흐트러진 신앙의 자세를 다잡고, 이 광야의 여정을 기꺼이 기쁨으로 걷기를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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