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던 유시민 작가의 책이다. 총평을 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생각과 의식에 자극을 주어 변화를 이끌어 낸 좋은 책이었다. 다양한 정치 철학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것들이 현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철학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진보주의 정치 철학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진단, 그리고 진보주의 정치 세력이 실제로 꿈꾸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있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다소 딱딱한 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쉽게 풀어낸 책이다.
좋은 국가란 무엇인가? 이 책의 서두는 2009년 초에 있었던, 소위 ‘용산참사’라고 불리는 비극적인 사건을 둘러싼 몇 가지 견해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경찰의 무력 진압에 대해 국가는 할 일을 했다, 혹은 할 일을 하지 않았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 등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런 사건이 벌어지는 국가를 훌륭한 국가라 할 수는 없다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면, 국가가 할 일이란 무엇인가. 국가라는 공동체에게 요구되는 미션과 역할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정말 오래 된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까지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온 정치 철학의 핵심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어서 저자는 여러 철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며, 다양한 정치사상의 핵심적인 이론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의 정치 이념 중 어떤 사조와 연관되어 있는지 설명해 보인다.
국가주의 정치관, 자유주의 정치관, 공리주의, 마르크스주의 등 다양한 정치 철학의 핵심 이론이 무엇인지, (분량이 분량인 만큼 맛보기에 그쳤겠지만), 들여다 볼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지식과 교양이 한 걸음 더 진보한 느낌이었다.
특히, 마지막 챕터에서 소개하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라는 개념은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자기의 정치 철학과 이념을 충실히 따르고자 하는 것을 신념윤리라고 한다면,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행동으로부터 예측할 수 있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즉, 현실적인 여건과 상황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는 것을 책임윤리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는, 직업정치인으로서 이상만을 추구하면서 그로부터 나타날 수 있는 결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를 도외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는 무대뽀 “좌파”가 아니다. 정부의 각료로서 실질적인 정책 입안과 집행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직업 정치인이었다. 재야에서 외치는 사람과 달리, 정치인으로서 현실적인 여건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책임윤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국가권력을 맡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수는 안정적이고, 진보는 불안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진보를 불안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아마도 진보주의 정치세력으로부터 “책임윤리”의식을 많이 발견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큰 목소리로 이념에 충실한 주장을 펼치는 재야 진보주의 정치세력들이나, 원내에 진출해서도 대책 없이 강성발언을 쏟아내는 일부 의원들을 보면 그런 우려가 일견 타당하기도 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반대세력들을 무작정 “종북좌빨”로 몰아대고 북한에 대해 맹목적으로 숨통을 조이겠다고 덤벼드는 일부 “수구꼴통”정치인들도 어쩌면 책임윤리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 요즘 어버이연합 같은 재야단체를 보면, “신념윤리”조차 없는 것 같다. 그들에게 무슨 이념이 있겠는가 말이다.
인간의 태생적인 심리라는 것이 본디 익숙한 것을 선호한다. 새로운 것을 어색해한다. 그래서 어떤 사회든, 보수주의 정치세력은 선거에서 항상 유리할 수밖에 없다. ‘뭔가 바꿔 보자’는 입장인 진보주의 정치세력은 “제도권 내의 형식적 절차만을 가지고서는”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재야에서, 원외에서 더 적극적이고 큰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소 과격한 시위를 할 수도 있고, 다소 억지 같아 보이는 주장을 펼칠 수도 있다. 그걸 가지고 “폭력시위”를 한다고 비난하고 그 목소리를 묻어버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재야의 목소리”를 통해서 “바꿔 보자”는 인식이 사회에 퍼져 나가게 되고, 점차로 그런 소수의 목소리는 주류가 되게 된다. 평등과 복지를 외치면 빨갱이 취급받던 시대에서, 이제는 보수주의 정치세력들도 평등과 복지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금일 박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보수주의 정당이라면 무조건 안보를 튼튼히 해 줄 것이고, 애국심이 투철할 것이고, 국민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 시절이 있었다. 진보는 좌빨이고, 북한과 내통해서 국가를 전복시킬 위험이 있는 불순세력이라는 오해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변화를 요구하는 진보의 목소리는 소수였고, 압도적 다수가 보수를 지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탄핵소추안 가결은, 이런 이념의 지형도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20~30년 전에 소위 “과격주의자”들이 외쳤던 주장은 이제 한국사회에서 조금씩 주된 담론으로서 받아들여져 가고 있는 것 같다.
국가주의 국가론은 강력한 경쟁력을 지닌 이론이다. 논리적으로 매우 단순명료해서 긴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가장 강력한 감정인 두려움을 정서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중략) 자유주의 국가론이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이념형 보수’를 무식하다고 경멸하거나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현실과 희망사항을 잘 구별하지 못한 소치일 가능성이 높다.
현실에 충실한 진보주의자 유시민의 정확한 진단이다. 북한의 위협이 실제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국가주의 국가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념형 보수 정치세력은 앞으로도 건재할 것이다. 보수정당 대통령이 탄핵되었다고 해서 보수정당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새누리당은 아닐지 모르지만. 좋고 싫고를 떠나서, 또 다른 대안 보수정당의 형태로 또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저자는 보수정당이 “강력한 감정인 두려움을 정서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원내의 진보주의 (혹은 자유주의) 정당이 이념형 보수의 정서적 기반이 되고 있는 실질적 두려움을 해소시켜 줄 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야당이 이에 대한 확실한 솔루션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면, “맹목적이고 무식한 이념형 보수”를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법치주의는 권력이 이러한 속성을 제멋대로 발현하지 못하도록,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못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원칙이다. 법치주의는 통치받는 자가 아니라 통치하는 자를 구속한다.
법치,법치 외치면서 시위대를 무조건 잡아 가두는 행위가 참 무식한 것이었구나. 새롭게 알게 되었다. 역시 책을 읽어야 한다니까. 이 개념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법치를 엉뚱하게 해석하게 된다.
국가와 정부의 구분은 현실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략) 정부를 교체함으로써 국가의 기능과 작동방식을 바꿀 수 있다면, 굳이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하여 사회의 기본 질서를 일거에 바꾸는 사회혁명을 할 필요가 없다. 자유주의자들이 사회혁명을 반기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생각 때문이다.
국가와 정부를 구분한다는 개념이 그 당시에는 매우 새로운 것이었을 것이다. 국가는 영속하지만 정부는 바뀔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공화정의 핵심 컨셉 중 하나이다. 아, 갑자기 생각난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 나왔던 “각하는 국가다”라는 구호. 각하가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 자유주의 정치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컨셉이다.
우리 겨레가 한반도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다시 국가적 통일을 이룬다면, 한국전쟁의 처절한 악몽의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그 기억이 계속해서 힘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망각과 용서가 필요하다.
이게 참 딜레마인 것 같다. 분단을 극복하고 북한과 평화체제를 구축해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터이지만, 그 상대가 대남적화 의지를 완전히 버렸다는 것을 어떻게 확실히 장담하고 안심할 수 있을까? 이것이 아마 진보주의 진영이 받는 가장 큰 질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북한의 목을 졸라서 숨통을 끊어 놓으면 대남적화 의지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게 소위 ‘수구보수’의 주장인데, 그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이념형 보수”정치세력은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제 북이 망할 때가 되었다,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숨통을 조여서 북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컨셉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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