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 석지영
하버드대 법학전문대학원 종신교수인 석지영 박사의 자서전이다. 평범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쉽지 않았던 학교 생활, 방황, 성취, 그리고 또 다른 길로의 방향 전환 등, 다이나믹한 과정을 거쳐 나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성장 스토리를 담담하게 담고 있다.
우선, 문체가 아주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뛰어난 번역가를 만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원문 자체가 유려하지 않았다면 이런 번역이 나오기도 힘들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독서의 즐거움을 일찍 깨달아 서점과 도서관이 놀이터이자 해방구였다는 일화가 나오는데, 많은 양의 독서와 작문 경험이 쌓여 고급스러운 문체를 구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참 부럽고, 도전이 되었다.
저자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환경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느낌을 저자는 “극한의 공포”라고 표현한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서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저자에게 학교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그런 충격적인 경험은 사람의 품성이 만들어지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명시적으로 언급했건 그렇지 않았건,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인생 이야기에서 엿보이는 성장기의 저자의 모습은, 내성적이고 자신감이 부족한, 그래서 오히려 완벽주의적인, 다소 까칠한 소녀의 이미지와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발레에 눈을 뜨고, 전문적인 발레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은 경험은 참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정말로 열정다운 열정을 쏟았다고 언급한 유일한 분야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교수가 된 이후에도, 이루지 못한 무용수의 꿈을 늘 아쉬워하고 발레의 길을 걷지 못한 것에 쓰라림을 느낀다는 언급이 후반부에 나오는데, 청소년기에 그가 발레에 얼마나 큰 열정과 사랑을 쏟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춤을 계속 추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나는 아직도 슬프다. 가슴 아픈 상실이었다. 그 때 이후로 내 인생의 반이 지나갔다. 물론 인생에는 그보다 훨씬 나쁜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나는 어린아이의 열정을 불어 꺼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에필로그 중에서
발레에 열정을 가졌고, 그것을 사랑했고, 재능이 있음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교육방침에 의해 그 열정을 강제로 접어야 했다. 이것이 큰 상처였고 큰 상실이 되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를 다 잘 할 수 있어야 해” 라는 교육철학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우리는 과연 여러 가지를 다 잘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과연 그것은 가능한 것일까?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무엇을 지향하고 아이를 교육시켜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여러 가지를 골고루 다 잘 하기를 바라는 것은, 결국 에너지를 분산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가급적 어릴 때, 잘 하는 것 한 가지를 발견해서 거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 탁월함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조금 더 좋지 않을까?
여하튼 저자는, 발레를 빼앗겼다. 그리고 예일대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옥스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글쓰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결국 이것도 극복되게 마련이다. 그의 어드바이저였던 말콤 보위 교수의 조언, 하루에 그저 딱 1.5페이지씩 쓰자는 전략이 마음에 와 닿았다. 저자는, 그 당시에는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매일 작은 진전이 모여 큰 것을 이루어 낸다. 초보들의 글쓰기가 힘든 것은 나뿐만이 아니란 사실에 위안을 얻었다. 결국 저자도 글쓰기의 막막함을 극복해 냈듯, 나 또한 그럴 것이니까. 저자는 나중에 법학자로 전향한 이후에 글쓰기에 대한 자기만의 원칙을 정립해 나갔다고 한다.
과하게 높은 기대를 품지 말고, 규칙적으로 글을 쓸 것, 주제에 대해 다 알지 못하더라도 글을 쓰기 시작할 것, 확신이 서지 않는 단어라도 일단 써 보고, 내용에 대해 더 알게 되면 완전히 다시 쓸 것, 쓰고, 연구하고, 읽고 다시 쓸 것, 이 과정을 반복할 것. 글쓰기는 배움의 한 방법이지, 학습을 마친 마지막 단계에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 분야 (문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나서, 자기에게 맞는 새로운 길을 찾아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 주고 싶었다. 나에게는 그런 용기가 있을까? 과감히 하고 싶은 것이 발견되면, 모든 것을 다 던져 버리고 다시 새 길을 찾아 나갈 용기가 있을까?
책의 후반부는 좀더 자유로워진 저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유소년기의 깝깝한(?) 모습을 어느 정도 벗어던지고, 완벽해지려 할수록 자유롭지 않다는 심오한 진리를 깨달아 가는 모습에서 나도 그런 갑갑한 틀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완벽하고자 하면 아프다. 엄청나게 아프다. 그리고 완벽해지지도 않는다. 코르셋이나 마모셔츠를 입는 것처럼 답답하다. 그렇게 넘어짐으로써 나는 나로부터 해방되었고,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그런 해방의 경험은 구원과도 같았다. (중략) 글쓰기 솜씨 또한 훌쩍 나아지기 시작했다. 글을 쓸 때마다 내 안에서 꿈틀대던 악마는 살며시 도망쳤다. 하버드 연구실에서 내 글길은 더 이상 막히지 않았다.
인생의 가치가 무엇에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저자는 이와 같이 말한다: 연구와 글쓰기를 통해, 배우고 창조하는 일에 집중하며 나 자신을 단련하는 데서 나는 환희를 맛보았다.
내 이야기에서 뭔가 전해진 것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성장이 요구하는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내 생의 여정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은 점차 커졌던 자유였다. 즉, 생각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놀 자유. 완벽하려고 애쓰는 이가 자유를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양날의 칼이다. 최고가 되기 위해, 완벽해지기 위해 분투하고 발버둥쳐 본 경험이 없이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게 되면, 결국 최고의 수준에 접근하지 못한 채로 평범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자기의 불완전함 때문에 고뇌해 보고, 어떻게든 더 나은 단계로 상승하려고 애써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어느 수준에서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진짜 자유를 맛보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자유를 맛보는 경험의 질이 달라진다. 완벽을 추구하되 불완전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
우리 모두 장영주나 김연아가 될 수는 없다. 그래도 괜찮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추구하는 행위의 핵심은 그 과정에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고 긴 인생 동안 보람과 기쁨을 누리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음악은 가장 위대한 인간의 창조물이자 선물의 하나다. 자신이 요요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음악 공부를 멈춘다면,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놀라운 의미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의 발전을 쓸데없이 멈추는 셈이 될 것이다.
장영주나 김연아가 되는 것이 인생의 참된 가치가 아니다. 글이든, 일이든, 예술이든, 학문이든, 자기를 수련하고 어제보다 더 나은 단계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그 과정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의미의 원천이 된다. 완벽해질 수 없다고 거기에 열정을 다 쏟지 않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아깝고 안타까운 일인가. 아, 그래야겠다. 직장인으로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든 아니든, 저자의 언급대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고 보람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 핵심임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야겠다.
어떤 부모들은 이런 질문도 할 것이다. 우리 아이가 영화나 야구에만 열광하면 어쩌죠? 그것 또한 열정이다. 열정의 정확한 내용보다는 열정이 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이가 필연적으로 영화제작자나 야구선수가 된다는 걸 의미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열정적인 시도의 경험은 훗날의 인생을 위한 배움의 모델이 된다.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열고 그들의 삶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성향을 갈고닦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열정의 내용보다는 열정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언급에 깊이 공감한다. 열정적인 시도와 경험 자체가 배움의 모델이 된다는 말은 참 명언이다. 저자가 발레에 열정을 가졌으나 그것을 전문적으로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열정을 가졌던 경험이 무가치한 것이 되는 게 아니듯, 무언가에 깊이 몰입하고 열정을 가져 본다는 것은, 그것이 직업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느냐의 여부에 상관없이 가치있는 것 아닐까.
나는 언제나 일상의 스케줄을 일관되게 짜려고 굳게 다짐한다. 단순화하고 또 단순화하겠다고 결심한다. 스케줄의 원활한 관리는 사실 현실이라기보다는 포부에 가깝다.
스케줄의 단순화, 그리고 루틴화가 중요하다. 매일같이 양말을 찾아 신고, 옷을 꿰어 입는 데 엄청난 노력과 정신활동이 투입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이미 습관화를 통해 자동적으로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일상의 스케줄이 단순화되어 몸에 밸수록, “습관화”를 통한 성취의 양과 질이 향상될 것이다. 나도 매일 자동적으로, 시간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몸이 먼저 반응할 때까지 스케줄을 일관되게 운영해야겠다.
나는 그날그날에 맞는 소박하고 운영 가능한 목표를 세우려고 노력해 왔다. 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거대하게 느껴지면 그에 압도되어 글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기대치를 낮추려고 시도했다. ‘하루에 250단어’라는 소소한 목표로 시작해, 매일 조금씩 목표를 높여갔다. 하루에 2,000단어를 초과해서 글을 써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목표의 수치에 상관없이 나는 미리 목표를 세우고 도중에 바꾸지 않으려고 애쓴다.
“아주 작은 반복의 힘”이라는 책에 나온 것처럼, 하루 목표는 잘게 잘게 쪼개서 매일같이 운영할 수 있도록, 부담되지 않게 운영해야겠다. 하루 반 페이지 쓰기. 그렇게 하루하루 반복시켜 나가는 것만이, 긴 시간 동안 꾸준히 글쓰기와 사유의 능력을 성장시키는 방법이 아닐까.
이 모두를 헤치고 나가는 중에도, 위안을 찾을 수 있는 내면세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바깥세상을 내다보기 위한 내면의 등불이라고 할까. 어린 시절부터 내가 백일몽에 잠겨 보낸 시간은 어마어마하다. 물론 그때도 책이 있었고, 지금도 책이 있다.
직업적 성취, 외적 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세계의 발전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 원천은 물론 깊이 있는, 그리고 꾸준한, 그래서 결국은 방대해진 독서량이 아닐까. 결국 내면이 얼마나 견고하고 건강한지가,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었다.
학문이든 과학이든 아니면 예술이든 양육이든, 남녀구별 없이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만 매우 높은 수준에서 그 일을 할 수가 있다.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 높은 수준에서 그 일을 할 수 가 있다는 말에 움찔한다. 업무도 해야 하고, 개인적인 성취와 발전을 위해 업무 외에 독서와 글쓰기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어느 한 분야에 엄청난 시간을 투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업무와 독서, 그리고 글쓰기를 아우를 수 있는 상위의 어떤 분야를 설정할 수 있다면 결국 그 분야에 많은 시간을 투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아직까지는 그게 무엇인지 잘 잡히지 않는다. 서너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것은 쉽지 않다. 충분한 시간공세를 할 수 없다면, 최대한 전략적으로 시간배분을 해서 집중도 있게 몰입하는 수밖에.
회사원은 그런 것이다. 자기의 항구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힘든 것이다. 내가 아이로 하여금 예술을 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단체나 조직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나갈 수 있는 적절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걸쳐 수련을 하고 발전할 수 있는 전문적인 분야라는 점에서, 내가 가지지 못한 장점을 누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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