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만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도 있다. (중략) 이들은 지금 필요한 조처를 하지 않아서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실패를 상상할 때 동기부여를 받는다.
- 하이디 그랜트 힐버슨 외, "어떻게 의욕을 끌어낼 것인가"
성공을 상상하라. 높은 보상을 추구하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이런 식의 동기부여는 흔히 알려져 있다.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 그런데,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둠으로써 동기부여를 받는 성향의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은 몰랐다. 실패를 피하는 데서 동기부여를 받는다? 책임지기 싫어서 복지부동하는 스타일을 묘사하는 것처럼 들린다. 저자는, "방어적 비관론"은 "부정적 사고"와는 다른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들도 동기부여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의욕적으로 일한다. 단지 그 동기가, 실패의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는 자각으로부터 온다는 것.
내가 하는 업무는 어떤 성향의 사람들에게 더 적합한가를 생각해 보았다.
반도체는 대단히 많은 공정을 거쳐야 제품으로 탄생할 수가 있다. 제조 과정에서 존재하는 작은 결함들이 치명적인 불량을 일으킬 수 있다. 함께 일하는 상사의 말씀대로, "반도체 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편집증이 있어야 한다. 아주 작은 위험 요소까지도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공정관리 업무는, 잘 했을 때의 보상보다는 잘못했을 때의 책임이 더 큰 직종이다. 제품이 잘 동작한다? 본전. 불량이 발생했다? 미리 발견하지 못한 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계측이나 체크의 누락으로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변명의 여지 없는 "경계 실패"이다. 그래서, 체크리스트 작성과 Plan B 의 수립, 그리고 리스크 발견은 공정관리자의 본질적인 업무영역이다.
불량 없는 제품을 만들 수 있는 표준공정을 확립하는 것은 반도체업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업무는, 안정지향적인 사람에게 더 적합한 것일지도 모른다. "잘 하면 큰 보상을 받을 거야"라는 말에 크게 고무되지는 않더라도, 불량 발생 가능성을 미리 찾아내는 데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매우 적합한 업무이다.
과거에는 이런 성향을 도전정신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실패를 회피하고 안정을 지향하는 성향은 회사에 별반 도움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안정 지향과 성취 지향 사이에 어떤 우열이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는 조직일수록, 합의된 표준과 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한 사람의 실패가 다른 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므로. 새로운 아이디어와 도전정신으로 실패할 수는 있다. 그 리스크도 조직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제한되어야 한다. 제대로 움직이는 조직이라면, 개인의 진취적인 도전의 영역이 전체 조직의 흥망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직원이라면, 기본적으로 안정지향적인 성향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다. 조직은 스타플레이어에 의해 운영되는 게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다.
나는 "쫄보"다. 크게 배팅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돌아오는 큰 보상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크지는 않)다. 항상 나타날 수 있는 최악의 가능성에 염두를 둔다. "아무리 못해도 이것보다는 낫겠지." 하는 생각이 들게 되면 비로소 일을 도모할 단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회사형 인간", 특히 "반도체 회사형 인간"인 것 같다.
회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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