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물쓰레기 처리기를 도입하다
몇 년 전 주방 싱크대에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를 설치했었다. 원래 아파트 입주박람회 때 꽤 크게 광고를 했던 아이템이었는데, 그 때는 큰 관심이 없었다. 비싸기도 했고, 시연할 때 조개껍질을 넣어서 갈았는데 물밖에 나오지 않아서 뭔가 사기스러운 느낌이 나서였다.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설거지를 할 때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게 적잖이 귀찮았다.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굉장히 어렵거나 힘든 일은 아니지만, 귀찮기도 하고 냄새도 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민폐 같기도 하고, 하여간 한 번 버리러 가는데 꽤 귀찮은 일이긴 했다. 이런 심리적인 저항감 때 문에 음식물 쓰레기는 쌓이기 일쑤였다. 집안에서 냄새도 나고, 위생상 여러 가지로 좋지 않았다.
음식물쓰레기 처리기는 아주 신박한 아이템이었다. 음식물을 넣고 갈아주기만 하면 깨끗하게 처리가 되니 따로 음식물 쓰레기를 봉투에 넣어서 아파트 밖으로 가져갈 일 자체를 없앨 수 있었다. 설거지에 대한 심리적 저항도 낮출 수 있었다. 음식물쓰레기를 만지고 처리해야 한다는건 설거지를 하기 싫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다. 원인이 제거가 되니 설거지도 제때 하는 게 그리 귀찮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집안도 깔끔하게 유지되었다.
심리적 저항감, 그리고 활성화 에너지.
물리학에는 액티베이션 에너지, 즉 활성화 에너지라는 개념이 있다. 반응을 일으키기 위한 자극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말한다. 활성화 에너지는 그 단어에서 느껴지는 직관적인 느낌과는 달리, 자연계에서 반응이 아무 때나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주는 장벽의 역할을 해준다. 이런 활성화 에너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세계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활성화 에너지가 너무 높으면 반응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반응을 시키기 위해서는 활성화 에너지를 낮춰 주거나, 또는 반응이 필요한 물질들의 에너지를 높여줘서 활성화 에너지라는 장벽을 쉽게 넘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활성화에너지"는 일상에서 만나는 귀찮은 일에 대한 심리적 장벽, 또는 심리적 저항감을 표현하는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다.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특히 하기 싫은 일수록 "하기 싫다"는 심리적인 장벽을 넘어야 한다. 그래서 하기 싫은 일은 계속 미루어지거나 또는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서 설거지는 하기 싫은 일이니까 계속해서 미루는 것이다. 그릇이 쌓여서 더 이상 새로운 음식을 해먹지 못할 지경이 되거나, 또는 주방에서 냄새가 나거나, 미관상 보기 좋지 못해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설거지를 하기 마련이다. 설거지를 하는 사람이 활성화되어서 (부정적이나마) 에너지를 얻어 심리적인 장벽을 결국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의 저자 앤서니 라빈스는 이런 현상을 두고 "충분히 고통스러워야 행동한다"고 표현한다.
하기 싫은 일이라면 심리적 저항 요소를 파악해서 없애야 한다.
하기 싫은 일이라면 활성화 에너지를 낮추어주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일을 미루는 것은 대개 매우 부담이 되거나, 어려운 일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쉬운 일이라면, 또는 즐거운 일이라면 실행에 옮기기 위한 심리적인 장벽이 낮아질 것이다. 주방에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를 설치한 건 그런 측면에서 매우 효과적인 결정이었다. 설거지를 하기 싫게 만드는 심리적 저항선인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부담스러움을 줄임으로써, 설거지를 행동에 옮기는 데 드는 시간을 훨씬 줄일 수 있었다.
우리 집에 "매직캔"이라는 쓰레기통이 있다. 쓰레기통 내부에 리필 봉투가 내장되어 있어서, 쓰레기를 비우는 과정이 훨씬 편리하다. 이런 도구를 사용하면 쓰레기를 교체하는 데 필요한 활성화 에너지가 줄어든다. 즉 심리적인 저항감이 낮아진다. 편리한 도구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편리함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 순간 시간을 절약하고 힘을 덜 쓴다는 것 외에도,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심리적인 장벽을 낮춰서 집을 더 깔끔하게 만든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너무 커서 (또는 크게 느껴져서) 부담스러운 일이라면, 작게 쪼개서 생각해 보는 것도 심리적 저항을 줄이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집안일 해야 하는데" 라는 과제는 대개 너무 크고 포괄적이다. 그보다는 "거실만 치우자", 또는 "설거지만 해놓자" 등과 같이 작게 쪼개면 접근하기에 부담이 덜 된다. 다 하려고 하지 말자. 다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작도 못하는 것보다는, 쓰레기통 하나만이라도 비우는 게 더 나은 것 아닐까? 그렇게 시작하고 나면, 작으나마 성취감도 들고 관성도 작용해서 다른 일도 처리하기가 더 쉬워진다.
심리적 저항을 높이는 또 다른 이유는 "불명확성"이다. 회사에서 상사의 지시사항은 대개 추상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시간이 얼마나 투입될지, 얼마나 어려움이 수반될지 등을 전혀 감을 못 잡은 업무라면 그만큼 스트레스가 커질 수 밖에 없다. "작게 쪼개기"방법은 이럴 때도 도움이 된다. 다 하려면 무엇을 얼마나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큰 덩어리로 쪼개고, 각 덩어리를 좀더 작게 쪼개면, 하나의 단위는 좀더 명확하고, 구체적이고, 쉽고, 그래서 수행하기 위한 심리적 저항이 작아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업무지시를 받을 때 궁금한 사항을 자세히 물어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이 때 심리적인 저항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금물. "하기 싫어?" 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또는 일단 "넵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접수한 뒤, 자리에 돌아가서 궁금한 내용을 리스트업 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결론. 의지력에 의지하지 말고 적절한 도구를 쓰자.
"쓰레기 버리는 게 귀찮으니 매직 캔 쓰레기통을 사자" 이렇게 말하면, "쓰레기 버리는 게 힘들면 얼마나 힘들다고 그러냐"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 직접 하시면 되겠네요) 하지만, 사람의 의지력은 한계가 있다. 그건 유한한 자원이다. 그리고 의지력은 그때그때 다르다. 의지력이 잘 발동 될 수 있도록 적절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지, 낭비가 아니다. "지금은 하기 싫지만 나중에는 꼭 할 거에요."는 미래의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과신이다. 지금 하기 싫은 건 내일도 하기 싫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의지력이 발휘되는 게 아니라면, 도구를 쓰자. 물리적인 도구를 쓰는 것도 좋고, 네이버를 켜고 씽크퓨어를, 매직캔 쓰레기통을, 로봇청소기를, 식기세척기를, 빨래건조기를 사자. 한번에 다 사지 말고 일년에 하나씩. 심리적인 도구도 적절히 쓰자. 한번에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제일 쉬운 거 하나를 먼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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