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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의 독서노트

독서후기 (2017-8) : 재정의 청지기 직분

by 데이빗_ 2017.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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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문제는 참 예민하다. 교회가 돈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정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시는가. 가난과 빈곤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가. 결국, “하나님께서 돈을 주시는가?”

이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참 많은 시간을 들였다. 헌금을 많이 하면 복을 받는가? 하나님께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면 그 대가로 복을 받는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어찌보면 지극히 세속적이고 탐욕적이고 초보적인 질문 같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돌보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쨌든 살아가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 돈은 권력이고, 영향력이다. 건강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지만, 돈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실 수 있다고 믿으면서, 그리고 구하면서, 돈을 구하는 것은 신앙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치부하는 것은 이중적인 태도이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돌보시듯, 우리의 지갑과 통장을 돌보시는 분 역시 하나님 아니겠는지?

“많이 드리면 많이 받는다.” “헌금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아낌없이 드려라”라는 가르침이 만연해 있다. 나 역시 그런 말에 현혹된 적이 있었고, “더 많이 받기 위해 더 많이 드리던”시절도 있었다. 때로 그런 방법이 통하기도 했지만, 간헐적으로 어쩌다 경험한 기적이 진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면 많이 돌려받는다”라는 관점으로 헌금을 강요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편승해서 “많이 돌려받을 탐욕으로” 헌금을 하는 것. 그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잘못된 출발이다. 첫째, 우리의 탐욕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의 복을 사려 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능력을 돈으로 사려 했던 사람처럼, 올바르지 않은 동기에서 출발한 종교적인 행동인 것이다. 둘째,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시도라는 점. 이것은 율법주의이다. 따라서, 반대급부를 바라는 강요된, 혹은 현혹된 헌금은 봉헌자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저자 앤드류 워맥 목사는, 헌금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헌금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왜 헌금을 해야 하는지, 헌금을 하는 사람에게 어떤 유익이 따라오는지를 온건하고 균형 잡힌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재정을 다루는 것이 믿음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 헌금을 하는 것이 우리의 재정관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러므로 왜, 어떤 자세로 헌금해야 하는지, 십일조는 오늘날 우리에게 강요된 의무인지,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등, 많은 질문들에 대해서 체계적인 논리를 가지고 대답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재정관과 헌금관에 대해 정립할 수 있었고, 재정과 신앙이 결코 따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킬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구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것에 관해서는 그들의 삶을 주님께 확실히 헌신했지만, 재정 문제에 관해서는 돈을 자기 소유로 생각합니다. 삶에 여러 가지 압박이 있기에 돈을 자기가 통제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와 같은 소유권 의식이 오히려 많은 문제들을 야기합니다.

영적인 것은 손에 안 잡히는 것이고, 지금 당장 나에게 무슨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지만, 손에 잡히는 돈은 당장 삶에 영향을 끼친다. 오만 원 중에서 만 원을 헌금하면, 당장 사만원밖에 안 남는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돈을 내 것이라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것을 잠시 맡았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진정한 신앙관을 보여주는 지표가 아닐까 싶다.

자기 자신을 공급자로 여길 때 돈 문제는 어려워집니다. 그럴 때 돈은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해야 하는가를 상기시킬 뿐입니다. 헌금이라도 하려고 하면 자신이 세운 재정적 목표점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만 같을 것입니다.

어려서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했었다. 당연히 수입에서 그것은 없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큰 믿음이 필요하지 않았다. 직접 돈을 벌고, 그것을 가지고 내 생활을 꾸려 나가야 하는 입장이 되니까, 십일조라는 것은 실제로 뛰어넘어야 하는 믿음의 허들이었다. 아무 걸림돌이 없이 하는 헌신과 봉사는, 그 의미 자체를 피부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너무나 당연했다. “십일조에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이 진짜로 있나?”라고 생각했다.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 내가 내 생활을 꾸려 나가려 하다 보니 십일조도 아쉬워지는 것이었다. 헌금을 줄임으로써 내가 내 생활을 직접 꾸리고 노후도 내가 직접 책임져 나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 공급자이심을 믿고 기꺼이 구제와 선한 사업에 드릴 것인가? 헌금은 결국, 가장 피부로 와 닿는 문제에 있어서 누가 주인인지, 누구를 믿는지를 묻는 신앙의 바로미터인 것이다.

정말로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십일조를 드리고 헌금을 함으로써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돈이 아닙니다. 당신이 무엇을 신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략) 당신이 재정에 신뢰를 두게 되면 당신은 돈의 노예가 됩니다.

수십만원의 돈을 다달이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인위적인 저축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내가 내 생활을 꾸려 나가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모든 것이 내 책임이 된다. 모든 것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의 압박과 스트레스는 참 힘든 거 같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재정 문제를 온전히 맡기면 그 이후를 책임져 주실 것인가? 믿음과 결단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재정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기로 결심했지만, 그 수준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지는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어느 정도까지가 “드림”이고, 어느 선 이후부터가 “무책임”인지, 전부 다 드리고 자기는 궁핍해진 사람도 있고, 다 끌어쥐고서 한 푼도 놓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 사이 어느 “적당한 선”을 찾는다는 건 쉽지 않은 문제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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