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컷=페미니즘??
배우 하지원씨가 숏컷을 했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로 오해를 받았다는 기사가 뜨고 있네요. 본인은 머릿결이 상해서 자른 거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해명을 했다고 합니다. 머리를 잘랐으면 페미로 오해를 받는다? 몇몇 관심종자들이 그런 댓글을 달았을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논란이 기사로 뜰 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숏컷을 했다는 이유로, 메갈리아에서 사용하는 어떤 단어를 쓴 적이 있다는 이유로, 특정 손가락 모양을 표시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페미니스트로 분류되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너무 좁은 표본만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현생이 바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페미인지 아닌지 알지도 못할 뿐더러,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더군요.
현생에 바쁜 사람들은 관심없어요
이런 이슈는 오히려 언론인, 정치인, 시민단체 사람들 등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활용하는 이슈가 아닌지 생각됩니다. 마치 누군가의 정치적 이념이 좌파인지 우파인지 하는 논쟁이, 일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체감되지 않는 탁상논쟁이듯, 누군가가 페미냐 아니냐도 사실 그렇게 삶에 큰 영향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미 누릴만큼 누리고 있고 안정된 삶이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네요.
사실 저는 페미니스트 때문에 제 권리를 침해받아본 기억도 없고, 인터넷에서 떠도는 "선택적 남녀평등주의"를 외치는 사람을 현생에서 본 적도 없어서, 도대체 저런 "쌈닭"같은 페미니스트는 뭐,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페미니즘은 나쁜 것인가?
그보다 좀더 본질적으로, 누군가가 "쟤 페미 아니야?" 라는 논쟁은 "페미니즘은 나쁜 이념이므로 근절되어야 한다"라는 명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명제는 참이 아니지요.
아마도 일부 토론 프로그램에서 여성의 권익 신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논리 없이 억지에 가까운 주장을 펼치고 있고,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모 변호사/작가의 백분토론 영상은 아주 유명하죠) 메갈리아 등 백래시 사이트에 대한 반감이 이미 사회에 만연해 있다 보니, 그것들을 페미니즘으로 묶어서 "페미는 나쁘다" 라는 인식이 퍼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 주장은 자연 도태된다
누군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는 사실이 곧 "그렇게 행동한다"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앞서 말한 그 변호사의 법률사무실은 남자 변호사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지요.
모든 고위직에 여성을 일정 퍼센트 이상 배정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실제로는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고, 주류 여론이 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보기에 따라서 어이없고 기분나쁠 수는 있지만, 그걸 일반화해서 "페미는 나쁘다"고 몰아갈 수는 없는 거겠죠.
사실 페미니즘의 본질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지극히 온당한 이념이지요.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주장하는 과정에서 논리가 아닌 억지를 쓴다든지, 물리적/비물리적 폭력을 쓴다든지 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성숙된 사회라면 그런 방식들은 자연히 도태되겠죠. 그 정도의 정화 능력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상검증 강요는 하지 맙시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에게 특정 이념을 가졌는지 아닌지 밝힐 것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말하면 끝날 문제야. 왜그렇게 예민해?" 라고 물어볼 문제가 아니지요. 예전에 국민의힘 탈북출신 어떤 의원이 국무위원 인사청문회를 하면서 "사상전향 했느냐"라고 물어봤을 때 국무위원 후보자께서 대단히 노기를 띠시고 발끈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김일성 개X끼 해봐" 라고 요구하는 게 폭력이라고 인식되는 사회라면, "너 페미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라고 강요하는 것은 더더욱 허용되지 말아야겠죠. 적어도 페미니즘은 "나쁜 사상"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그냥 냅두자고요.
기자님들, 운동선수는 운동 하게 둡시다. 배우는 TV에서 보는 걸로 만족하시죠. 숏컷을 하든 스포츠머리를 하든 냅두시고요, 남는 시간에 트위터에 오조오억을 하든 메갈리아를 하든 현생에 바쁜 사람들은 관심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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