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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의 독서노트

독서후기 : 부모공부

by 데이빗_ 2016.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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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view>

주말에는 책쓰기 강좌로 오후 내내 집을 비워야 하다 보니, 그 외의 날에는 가급적 아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야 아내도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테니까. 완전 갓난아이 때는 아기 보는 것이 힘들기만 했는데, 조금씩 말을 시작하니 나름대로 그럭저럭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아 재미가 있다. 혹시 엄마 없이 아빠랑만 있다가 울어도, 대응이 된다. 울면 도깨비가 나타난다고 겁을 줄 수도 있고, 아빠 말 잘 들으면 조금 이따가 젤리 사준다고 협상을 시도할 수도 있다. 밥을 먹어야 호랑이를 무찌를 수 있다고 구슬릴 수도 있다. 아빠만의 양육 철학(!!)을 실천하기도 좀더 자유롭다. 가끔 마이쮸를 먹이거나 뽀로로를 보여 줘도 아내에게 혼나지 않으니까. 하루 종일 아기와 놀고 온 날은 밤에 잘 때도 엄마보다는 아빠 옆에 와서 못 자게 괴롭혀서(?) 나름대로 보람도 있다.

공부도 조금 된다 싶으면 더 잘 하고 싶듯, 아빠 노릇도 “나름 좀 된다” 싶으니 좀더 잘 해 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리디북스에서 책 쇼핑을 하던 중, 책 표지가 눈에 띄어서 샀다. 전혀 예쁜 표지는 아니지만. 세련된 책표지가 넘쳐나다 보니, 오히려 약간 올드해 보이는 디자인에 눈길이 간다. 무심한 제목도 한몫 했다. “부모공부”라니. 나름 공부 많이 했어도, 부모 공부는 해 본 적이 없다. 아빠가 된 지 28개월차인데 이렇다 할 부모 공부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짝 반성의 의미를 담아 책을 샀다.
“부모공부”는, 솔직히 말하면, 마음에 와 닿는 깨달음이 넘치는 책은 아니었다. 책 한 권에 엄청난 깨달음을 얻고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는 일이 본래 흔한 건 아니지만. 담담하고, 다소 무미건조한 느낌도 들었다. 꼭지마다 주제가 분명해서 빠르게 읽혔다. 연구된 과학적 사실에 기반해서, 부모가 아이를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은지 분명한 지침을 주어서, 사실 꼭지마다 마지막 부분의 결론만 찾아가며 읽어도 책 한 권을 다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 특히 관심을 기울이며 읽었던 부분은, 아이의 지적 능력 성장을 위해 부모가 무엇을 해 줄 것인지에 관해 설명해 주는 몇몇 장이었다. 독서교육, 어휘력 등에 관한 챕터들이 그것이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의 유익이 무엇인지 몸소 깨달은 아빠로서, 아이에게도 같은 유익을 누리게 해 주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할 계기가 되었다.

꼭 독서교육 뿐 아니라도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상당히 광범위하다. 한 번 읽고 한 가지 메시지를 얻어가기보다는 두고두고 읽으면서 레퍼런스로 삼을 만한 책에 가깝다.

<기억에 남는 구절들, 느낀 점, 배운 점>

이렇게 세상은 부모들을 “완벽”이라는 감옥으로 세차게 떠밀고 있다.... 인간이 신처럼 되고자 한다면, 결국 얻는 것은 죄책감과 무력감뿐이다. (중략) 완벽을 요구하는 ‘양육 완벽주의’가 엄마를 완벽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엄마와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씩 인터넷을 하다 보면 아이에게 이걸 해야 되고 저걸 하면 안 되고.. 등의 “Do & Do not” 리스트를 적어 놓은 기사를 볼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아기에게 소리를 지르면 안된다”, “야단칠 때는 차근차근 잘 설명해서 아이를 납득시켜야 한다“ 같은 것이다. 그 밑에 대개 어김없이 달리는 베스트 댓글의 유형 중 하나는, “이분 최소 아기 안 키워 보신 분”.

완벽한 직장인은 책 속에서나 존재하듯, 이상적인 부모도 글 속에서나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 육아 지침을 담은 기사는 어느 짧은 시간에 작성된 것이지만, 육아는 길고 긴 시간 동안 이뤄지는 삶 자체이다. 어느 시점에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누구도 완벽한 인간이 아니듯, 누구도 완벽한 부모가 아니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아, 내가 완벽한 아빠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나쁜 아빠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도. 내가 완벽하지 못한 아빠라도, 나는 여전히 유일한 아빠이고, 여전히 좋은 아빠이다. 앞으로는 좀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으리라.

만약 학생들이 과도한 성취 기대와 강제적인 학업에 대한 강요를 받고 있다면, 이는 학교보다는 학부모에게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스트레스는 아이의 미래를 망친다. 자녀라는 캔버스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탁 트인 여백을 그려 넣을지, 부모의 욕심을 빡빡하게 그려 넣을지는, 부모인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평상시에 가지고 있던 지론을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된 계기. 나는 아이에게 좋은 성적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초조해하지 않을 것이다. 자사고 특목고, 서울대 연고대 등, 세상의 잣대에 동조되어 아이에게 그런 길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은 하지만,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회사에서 동료들과 커피 한 잔 하면서 아기 이야기가 나와도, 우리 아기는 벌써 영어 배운다는 말에 흔들리는데. 앞으로 아이가 자라가면 더더욱 그러겠지. 성적으로 남들과 비교되는, 그게 당연시되는 교육 환경은, 폭력이나 마찬가지다. 아빠 세대가 경쟁적인 환경을 뚫고 자랐으니 나도 은연중에 아이에게 경쟁을 강요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단단히 결심을 해도 흔들릴지 모르지만, 그런 자각조차 없다면 더더욱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아빠의 교육 철학이 정말 중요한 게 아닐까. 아직 아이가 어려서 다행이다. 아빠도 아직은 어리다. 책 많이 읽고 중심 잘 잡아서, 경쟁에 아이를 내몰기보다는, 이 폭력적인 환경에서 아이를 지켜주고 감싸주는 아빠가 되기를.

“어휘 처리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이미 알고 있는 단어를 빠르고 쉽게 효율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알고 있는 단어를 빨리 효율적으로 처리하다 보면 결국 새로운 단어나 언어를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어휘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서운 말이다. 어휘력에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난다니. 예전에 아이의 교육 노선을 놓고 아내와 의견 충돌이 있었다. 한글 교육을 먼저 할 것이냐, 아니면 독서 교육을 먼저 할 것이냐. 두 개념이 대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문자교육을 먼저 시켜서 아이가 “혼자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능력을 계발해 주자는 입장이었고 (나는 세 살 때 한글을 먼저 깨우쳤고, 네다섯 살 때 집에 있는 동화책과 아버지의 소설책 등을 읽기 시작했다), 아내는 웅진북클럽 서비스에 가입해서 (명작동화 아기개념 그림책 등, 프로그램에 따라 구성된 전집을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엄마가 아이 옆에서 계속 책을 “읽어 주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아내의 의견을 따랐고,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아기는 아직 한글을 읽지 못하지만, 어린이집 선생님의 가정통신문 등을 보면, 또래 아이들보다 더 풍부한 어휘를 구사한다는 평을 받는다.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지 않기로 해 놓고서!!) 정서 표현도 더 구체적이고 대화도 상당히 정교한 것도, 아마도 그림책을 많이 보고 듣고 하면서 일상에서 엄마아빠가 잘 쓰지 않는 단어나 의성어 의태어 등을 접할 기회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어려서부터 독서 교육에 힘써야 하는구나. 아기에게 책을 읽어준 게 언제지? 반성해야겠다.

부모가 거의 날마다 책을 읽어준 아이들은 15세 무렵 독해능력에서 훨씬 앞섰다. 부모가 책을 읽어준 시간이 길수록 아이가 자랐을 때 독서수준이 높다고 한다.... 부모가 3~5세의 2년 동안 일주일에 5회 이상 동화를 읽어준 경우,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관계사절을 이용하는 등 긴 문장을 잘 구사했다.

나는 우리 딸이 공부 잘 하는 아이이기보다는 “책을 읽을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입시 공부에 매달려 폭넓고 풍부한 책을 읽을 기회를 놓쳐야만 한다면, 기꺼이 입시를 포기하고 풍부한 독서의 찬스를 잡을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혹시 입시경쟁의 풍파에 나도 휩쓸릴지 모르는 일이지만, 이렇게 아이가 어릴 때부터 반복적으로 단단히 결심해 놓지 않는다면 아이를 입시경쟁에서 어떻게 지켜줄 것인가. 고작 좋은 대학 보내겠다고, 두뇌가 가장 말랑말랑한 초등학교 청소년기 시절에 폭넓은 책을 읽고 사고와 의식을 넓힐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너무도 아까운 노릇이다. 수치화된 스펙이 의미가 없지만 굳이 수치적으로 스펙을 적자면, 내신 몇 등급 혹은 수능 몇 점, 토익 몇 점보다는,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 자기 손으로 쓴 서평 1천 편을 축적된 자기 블로그를 가지게 되면 좋겠다. 좀더 욕심을 낸다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자기 이름으로 쓴 책 최소 한 권은 출판했으면 좋겠다. 내가 독서강좌도 듣고 책쓰기 강좌도 듣는 것은, 아빠로서 미리 경험해 보고 아이에게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공학자로서 얄팍한 물리지식을 보태자면, 자연계의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점점 증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편 진리이다.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위계질서로 딱 잡혀진 조직내의 분위기는 점점 자유로워지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고, 한 가지 스펙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적인 경향은, 점점 수치화된 스펙을 탈피하는 쪽으로 움직여질 것이다. 아이 세대에는 진로도 점점 다양해질 것이고, 성공하는 방법도 점점 다양해질 것이다. 성공의 정의도 (과거에는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 등 한 가지였다면) 앞으로는 점점 다양한 성공의 척도가 제시될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잘 주목하고 아이에게 바뀌고 있는 세상을 알려주는 아빠가 되어야겠다.. 아니, 그렇게 트렌디하고 멋진 아빠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꼰대 아빠는 절대 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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